19세기 독일은 국가주의가 발달되었다. 이시기 옆나라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시작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기조를 두려워했던 독인은 국가주의 정책을 펼쳐나갔다. 독일의 철학자였던 피히테는 "국민은 국어에 의해 구분되고 형성된다"며, 독일어를 사용하면서 역사, 지리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러한 국가주의를 통한 애국심 고취 활동의 일환으로 체육과 음악이 활용되었다.
독일의 대표적 체육은 체조였다. 게르만 전사의 전통 기풍을 따르며 독일에서 체조가 발달되었고, 이는 영국, 미국 등으로 확산되었다. 독일 체조의 발전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 19세기 나폴레옹의 침략에 함락당한 독일은 자존심이 무너졌다. 이런 시점에서 프리드리히 얀은 '독일 국민성'이라는 책을 발간하며, 독일이 다시 게르만의 후예로 인정받기 위해서 체조 운동을 만들었다. 체조라는 신체활동을 통해 독일의 민족성 회복 및 국민간의 정서적 통합을 이루며, 나아가 국력 증진으로 나폴레옹의 지배하에서 벗어나고 함이었다. 얀은 옥외 체조장을 설립하여 독일 전역에 체조를 보급시키고자 했다. 8년 동안 독일체조운동인 튜른베베궁을 확산시켰다.
체조 운동이 확산되면서 1842년 학교 수업 과정으로 도입되었고, 2년 뒤에는 전국의 중학교 및 사범학교에서는 의무적으로 체조 시설을 갖춰야 했다. 이처럼 학교 체육 내에서 체조가 발달한 배경에는 '스피스'가 있었다. 스피스는 체육은 인지적, 정신적, 신체적 발달에 가장 적합한 교육으로 생각했다. 특히 체조를 통해 이러한 전인적 교육을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기존 체조에 머무리지 않고, 도수체조, 행진체조, 음악과 결합한 체조 등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체조를 변형시켰다. 더 나아가 기구없이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자유체조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노력 덕에 학교 체육 내에서 체조운동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러한 체조운동 확산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반동통치시대가 시작되면서 정부는 체조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이러한 시기에 체조가였던 칼 산트가 반자유였던 코체브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체조를 탄압할 명분을 찾고 있던 독일 정부는 자유 및 민중운동적 성격에서 탄생한 체조를 혁명 활동으로 간주하였다. 체조를 탄생시킨 얀은 구속되었고, 1848년 체조운동 조직역시 해체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체조 사랑은 다시 한 번 불타올랐다. 1860년 체조운동 조직이 다시 출범하였고, 조직의 지도자들은 정치와 무관하게 활동하겠다는 서약을 하며 국가로 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음지에서 체조를 즐기던 단체들이 양지로 올라오면서 1868년 15개 지방, 약 13만명의 회원을 가진 전국 체조연맹이 발대식을 가졌다. 이처럼 체조 활동이 권장되면서 100만명의 회원을 가진 메가 조직이 되었다.
국가적 이데올로기 상황에서 탄생한 독일의 체조는 독립과 통일, 자유주의 운동 확산에 이바지했다. 더불어 얀의 사회 체육에서 시작하여, 스피스의 학교 체육으로 발전면서 체조 운동의 체계를 만들어냈다. 이후 칼 폴렌, 레이버 등 독일의 체조 지지자들을 통해 미국으로 퍼져나가며 전 세계적 종목으로 발돋움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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