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베르탱의 관심으로 부터 시작된 근대올림픽의 시초
우리가 아는 근대 올림픽은 1898년 올림픽 탄생지인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제1회 올림픽 대회 (olympic games) 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근대 올림픽 개최의 최대 공신은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탱 이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쿠베르탱은 고대 올림픽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종합운동경기대회를 개최했다. 그가 이렇게 스포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그친것이 아니라, 대회까지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영국의 공공학교에서 이뤄지는 스포츠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서, 프랑스 또한 영국 처럼 스포츠를 교육에 도입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프랑스의 스포츠를 통한 교육 개혁을 주장했던 쿠베르탱은 훗날 국제올림픽위원회 (IOC)를 창설했다.
근대 올림픽의 설계자 페니 브룩스
프랑스에 쿠베르탱이 있었다면 영국에는 페니 브룩스가 근대 올림픽 부활에 큰 역할을 했다. 영국 체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브룩스의 직업은 의사였다. 학자로서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컸던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지역에서 머치웬록올림픽게임을 개최했다. 작은 마을에서 펼쳐지는 대회였지만 육상, 크리켓 등 다양한 종목과 나름의 체계를 갖춘 대회였다. 해를 거듭할 수록 대회는 짜임새를 갖추었고, 이는 다른 나라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브룩스의 소식을 들은 그리스 학자 자파스는 머치웬록올림픽게임을 보고 그리스에서 자파스 올림픽 게임을 개최하게 된다. 아테네에서 열린 박람회의 서브 이벤트 개념이었지만 고대 올림픽의 개최지인 아테네에서 이런 대회가 개최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브룩스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프랑스의 쿠베르텡을 직접 초정하여 머치웬록 올림픽대회를 보여주었다. 이를 보고 확신을 얻은 쿠베르텡은 올림픽 부활을 위해 두 손을 걷어부쳤다. 1890년 쿠베르텡은 전 세계가 함께 종합운동경기대회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세계적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 각 계에서는 부정적 시선이 강했다. 그럼에도 쿠베르텡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894년 파리 소브논느대학에서 파리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여 고대 올림픽의 부활을 제안했고, 이는 일주일 동안 뜨거운 토론을 거친 끝에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그 결과 근대올림픽의 부활이 결정되었다.
올림픽의 부활
파리국제학술대회에서 결정된 다섯 가지 주요사항은 1. 1896년을 근대올림픽의 첫 해로 정한다. 2. 고대올림픽대회의 전통에 따라 4년마다 열리며, 개최지는세계 각 국의 대도시를 순회한다. 3. 경기종목은 근대 스포츠로 제한한다. 4. 제1회 대회의 권한은 쿠베르텡과 비켈라스가 담당한다. 5. 대회 관련 최고의 결정권을 가지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구성한다. 이다. 이처럼 큰 틀이 정해지자 근대 올림픽의 개최는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첫 대회가 1896년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이처럼 근대올림픽의 설계자 페니 브룩스와 제창자 쿠베르텡의 노력으로 우리는 현재 전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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